
제주도에 살면서
'다음에 가지' 라는 마음으로 가지 않은 곳이 참 많습니다.
'다음에' 라며 미루다 보니 가본 곳이 별로 없더라구요.
그래서 가까운 곳 먼저 하나씩 다녀보려 합니다.
추사 김정희 유배지에 다녀 왔습니다.
추사관은 매주 월요일 휴관이라고 하는데 제가 방문한 화요일 휴관이었네요
아쉽지만, 유배지만 돌아보고 왔습니다.
주소 : 제주특별 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44
추사 김정희는 시,서,화 분야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예술가이다. 현종 6년(1840) 55세 되던 해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제주도로 유배되어 헌종 14년(1848) 까지 약 9년간 이곳에서 머물렀다. 유배 초기에는 포교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 뒤 이 곳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 왔다. 이곳에서 살면서 제주 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으며 제주 지역의 학문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차를 매우 좋아한 김정희는 다도의 대가인 초의 선사와 평생 우정을 나누었으며 제주 지역에 차 문화를 도입한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김정희는 추사체를 완성하고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세한도를 비롯하여 많은 서화를 남겼다. 이곳은 집터만 남아 경작지로 이용되다가 1984년에 강도순의 증손의 고증에 따라 복원되었다. 2010년에 세워진 추사관에는 김정희와 관련된 역사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추사 유배지의 밖거리

밖거리는 김정희가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던 곳이라고 합니다.
김정희에게는 문하생이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제주 유배 시절에도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고 합니다.
안거리

안거리는 집주인 강도순이 가족들과 생활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강도순은 김정희가 제주 유배시절 가르친 제자 가운데 한사람 이었는데,
강도순네 밭을 밟지 않고는 마을을 지나갈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고 합니다.
모거리

모거리는 김정희가 기거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집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위리안치의 형을 받은 김정희는
이곳에서 학문과 예술을 심화시켰고, 그의 추사체는 벼루 열 개를 구멍내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어지게 했다고 할 정도로 고독한 정진 속에서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 나온 내용 처럼
가시나무로 '위리안치' 를 재현 하려 노력한 흔적도 볼 수 있었습니다.

유배지에 많이 보이는 수선화는
추사 김정희가 좋아하던 꽃이라고 합니다.
집주인이 무척 부유했다고 하는데
집의 규모가 작다는 생각과
그 작은 집을 밖거리, 모거리 두채나 김정희에게 내주었다는 점이 대단하다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옛 초가집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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